(수학 읽기 지료) 수학자 라이프니츠
수학자 라이프니츠
17세기의 만능 천재 라이프니츠(Leibniz, G. W. ; 1646~1716)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윤리학(도덕학)교수의 아들로 1646년 7월 1일에 태어났다.
1652년에 아버지Friedrich Leibniz가 사망하고 이후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661년 겨우 14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했고, 1663년에 일반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예나(Jena)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다시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가서 법학 박사학위를 목표로 공부했다.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지만 1666년에 논문을 제출하고도 어리다는 표면상의 이유로 박사학위는 받을 수 없었다.
곧바로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옮겨 1667년에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뉘른베르크에서 역사를 활용한 교육 방법에 관한 훌륭한 글을 써서 마인츠(Mainz)의 선거 후(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중 황제선거권을 가졌던 제후)에게 헌정했다.
이를 계기로 선거후로부터 여러 가지 법전을 다시 편찬하는 과제를 위임받았다.
그 뒤 외교관으로 여생을 보냈는데, 처음에는 마인츠의 선거후를 위해, 그리고1676년경부터 죽을 때까지는 하노버의 선거후들을 위해 일했다.
라이프니츠는1672년 외교적인 목적으로 파리에 있었을 때, 학술계의 동향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뛰어난 수학자 호이겐스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수학을 배웠다.
1673년에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런던을 방문했는데, 자신이 발명한 곱셈 계산기를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하노버 군주의 사서가 되기 위해 파리를 떠나기 전에 이미 미분 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했고 이 분야의 많은 기호를 개발했으며 미분법의 기본공식을 많이 고안했다.
라이프니츠는 1682년 멩케와 함께‘학술기요’라는 잡지를 발간했으며, 편집장이 되었다.
1700년에는 베를린 과학회를 창설했고, 이와 유사한 학회를 드레스덴, 빈, 상트페트르부르크에도 창설하게 했다.
말년에는 미분 적분학의 발견과 관련된 뉴턴과의 불미스런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714년 그의 고용주는 잉글랜드 최초의 독일인 왕 조지 1세가 되어 떠났고, 그는 하노버에 잊혀진 채 남아 있었다.
1716년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는 그의 충직한 비서만이 참석했다.
라이프니츠는 1670년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을 제안했다.
이는 루이 14세가 유럽, 특히 독일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바꾸게 하려는 의도였다.
2년 뒤 프랑스의 외무장관은 이의 논의를 위해 라이프니츠를 파리로 초정했다.
20대 중반의 젊음 외교관은 유럽문화의 중심지 파리를 들뜬 마음으로 방문해서 4년 동안 머물렀지만 왕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의 이집트 공정은 나폴레옹시대까지 거론되지 않았으며, 이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글은 하노버의 문서 보관소에 묻혀 있었다.
실제로 1798년 이집트를 침략했던 나폴레옹은 1803년 하노버를 점령했을 때, 독일 수학자 라이프니츠가 이미 백년 훨씬 전에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을 제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라이프니츠는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였는데, 법학, 종교, 정치, 역사, 문학, 논리학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산스크리트 학자로서도 명성을 얻은 매우 재능있는 언어학자였고 철학에서도 높은 위치를 점했다.
라이프니츠는 수학에서도 지수 개념의 정립 등 다양한 분야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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